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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히틀러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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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rhans 작성일22-06-14 04:32 조회2,0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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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소환

히틀러는 집단 학살 광 이라는 점 외에도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일면이 있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히틀러는 오랫동안 조롱거리로 묘사되어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나치의 조직은 무자비 하리만치 능률적 이었으며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 일, 즉 독재에는 밤낮으로 열심히 임했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히틀러는 무능하고 게으르고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정부는 완전히 코미디였다. 사실 오히려 그 덕분에 그가 득세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독일 지도층은 그를 시종일관 과소평가했다. 그가 총리가 되기 전, 정적들은 그의 투박한 연설과 유치한 유세를 들어 그를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했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그는 '한심한 얼간이'였다. 또 어느 잡지는 그의 당이 '무능력자 집단'이며 '어중이떠중이들 잔치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거를 통해 나치가 독일 최대 의회 최대 정당이 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히틀러가 허세에 찬 바보이고 호구이니 똑똑한 사람들에게 쉽게 조종당하리라 생각했다.

당시 독일 총리 자리에서 밀려난 프란츠 폰 파펜은 권력을 되찾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봉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 연립내각을 수립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마침내 1933년 1월, 협상이 성공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가 되고 내각은 파펜에 우호적인 보수 관료들로 채워졌다. 파펜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기에게 실수했다고 경고하는 지인에게 '그자는 우리 하수인'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른 지인에게는 두 달이면 히틀러는 구석에 몰려 힘이 빠지게 될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두 달 만에 히틀러는 오히려 나라를 완전히 장악했고, 자신에게 초헌법적 권한과 대통령직에다 의회까지 통째로 넘겨주게 될 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의회를 설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순식간에 민주주의를 끝내고 있었다.

독일의 지도적 인사들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히틀러를 얕잡아 보았을까? 히틀러의 무능함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도 히틀러의 야욕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히틀러는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그의 공보 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훗날 회고록 《내가 알던 히틀러》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12년간 통치하면서 문명국가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정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히틀러는 문서 읽기를 질색했다.
보좌관들이 올린 문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잦았다. 부하들과는 정책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으로 일장 연설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늘 난장판이었다.
관료들은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고, 누가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잘 몰랐다. 히틀러는 어려운 결정을 해달라고 하면 결정을 한없이 미뤘고, 결국 느낌대로 결정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측근들도 그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렇다 보니 관료들은 나랏일 수행은 뒷전이고 종일 서로 갈라져 싸우고 헐뜯기에 바빴고, 그날그날 히틀러의 기분 상태에 따라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거나 그의 눈을 피할 생각뿐이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히틀러가 매사를 제 뜻대로 하려고 일부러 수를 쓴 것이냐, 아니면 그냥 업무 지휘 능력이 형편없이 떨어졌던 것이냐, 하는 논란이 좀 있다. 디크리히는 이것이 분열과 혼돈을 조장하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입장이다. 히틀러가 그 방면의 선수였던 건 맞다. 하지만 히틀러의 개인적인 습관을 볼 때. 그냥 일하기 싫어하는 자아도취증 환자에게 나라를 맡겨놓으니 그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히틀러는 엄청나게 게을렀다.
그의 보좌관 프리츠 비데만에 따르면, 그는 베를린에 있을 때도 11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점심 전까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에 실린 자기 기사를 읽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디트리히가 꼬박꼬박 기사 스크랩을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자기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니까 베를린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집무실을 떠나 오버잘크베르크의 개인 별장에 갔고, 거기서는 당연히 일을 더 안 했다. 그곳에서는 아예 오후 2시까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하는 일은 산책 아니면 새벽까지 영화 보기가 거의 전부였다.

그는 대중매체와 유명인에 집착했으며, 그러한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종종 바라보았던 것 같다. 스스로를 가리켜 "유럽 최고의 배우"라 하기도 했고, 한 번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 "내 인생은 세계사를 통틀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네"라고 했다. 그의 개인적 습관은 특이하거나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았다. 낮에는 꼭 낮잠을 잤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단 것을 엄청나게 좋아해 "케이크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으며 "찻잔에 설탕 덩어리를 어찌나 많이 집어넣는지 차를 부을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무식함에 콤플렉스가 심했기에, 자기 선입견에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이 식견을 말할 때면 폭언을 퍼붓곤 했다. 누가 자기에게 반박하면 "호랑이처럼 격노했다"고 한다. "사실을 말해줘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에게 누가 사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데만은 개탄했다. 히틀러는 남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을 질색했지만, 남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은 좋아했다(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조소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멸시하는 대상이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갈망했으며, 신문에 자기를 칭찬하는 글이 실리면 기분이 금방 좋아지곤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은 특별한 비밀도 아니고 모르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히틀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저 "정신이 반쯤 나간 인간"이니 "발성 기관이 맥주에 절은 자"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고, 그러다가 큰코다친 것이다. 사람들은 어찌 보면 그를 옳게 판단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개인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사로잡는 정치적 수사를 펼치는 데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또, 정부란 그다지 유능한 정부가 아니어도, 제대로 돌아가는 정부가 아니어도, 끔찍한 짓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끔찍한 사건의 배후에는 뭔가 치밀한 고도의 기획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만도 하다. '아니, 그렇게 엄청난 비극이, 무슨 천재 악당이 사주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벌어질 수 있겠는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천재 악당이 눈에 띄지만 않으면 별일 없겠구나, 하고 안심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오판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거듭 저지르는 실수다.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人災들은  대개 천재 악당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와 광인들이 줄지어 등장해 이랬다저랬다 아무렇게나 일을 벌인 결과다. 그리고 그 공범은 그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들이다.

Pastor Dr PKHANS 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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