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th} 그림자를 판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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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rhans 작성일21-01-29 16:08 조회7,13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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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위해, 신앙을 포기해야 하나?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으로 돈을 벌고
현명한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사간다.
매일 86,400원을 주는 나라가 있다.
방금 탯줄을 자른 아기도, 100세 넘은 할머니도, 한 명도 빠짐없이 이 돈을 받는다. 단 조건이 있다. 저축하지 말고 써야 한다.
매일 입금되는 돈을 하루 안에 다 써야 한다.
개인 통장에 매일 86,400원이 입금되지만,
사용하지 않은 돈은 통장에 남지 않는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 돈을 ‘시간’이라 부른다.
1분은 60초이고, 1시간은 3,600초이며, 하루는 86,400초다.
누구에게나 이 시간은 주어진다.
누구나 공평하게 받은 시간을 저마다 다르게 사용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으로 돈을 벌고,
현명한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산다.”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돈을 주고 시간을 사려고 하지만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시간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한다. 가치를 모르니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 독일 소설 **
< 그림자를 판 사나이 >
(원제/ 페터 슐레밀의 신기한 이야기)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버린 남자 이야기다.
가난한 주인공 페터 슐레밀.
그는 어느 날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상의 주머니에서 무엇이든 꺼냈다.
처음에는 가죽 주머니,
그 다음은 커다란 망원경,
그 다음에는 6미터가 넘는 양탄자,
심지어 살아있는 말 세 마리를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가 페터 슐레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의 그림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혹시, 저에게 당신의 그림자를 넘겨주실 수 있을까요?”
“당신은 그저 고귀한 그림자를 들어 올려서 제 안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허락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대가로 언제든 금화를 꺼낼 수 있는 ‘행운의 자루’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서 커다란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그 자루 안에서 10개의 금화를 끊임없이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슐레밀은 얼른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거래합시다. 내 그림자를 가져가시고 그 자루를 주세요.”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지체 없이 슐레밀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슐레밀의 그림자를 풀밭에서 살짝 거둬들여 둘둘 말아 접은 후 몸 안에 집어넣었다.
슐레밀은 하찮은 그림자보다 금화를 꺼낼 수 있는 자루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주저하지 않고 그림자를 팔아버렸다.
이후 슐레밀은 자루에서 많은 금화를 꺼냈다.
누구보다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슐레밀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나님 맙소사!
저 불쌍한 사람에겐 그림자가 없네!”
또 비난하기 시작했다.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에서 걸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
그제야 그림자를 팔아버린 것이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금화가 많아도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자의 가치는 슐레밀의 생각보다 컸다.
슐레밀은 가는 곳마다 돈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어디서나 예상치 못한 일은 발생하는 법.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들켰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경멸했고 배척했다. 결국 슐레밀은 그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한 번은 철저한 준비를 하고 도시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정착해서 살기로 한 도시에, 믿을 수 있는 하인 벤델을 먼저 보냈다. 벤델은 그곳에서 집을 구해 주인에게 맞게끔 꾸몄다.
집안 어디에 있어도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구조를 변경했다. 집 앞에는 나무로 우거진 공간을 만들었다.
해가 떠도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게 했다.
슐레밀은 그곳에 정착했고, 많은 돈을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미나’라고 하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미나’의 부모에게 들키고 만다.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나’의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다시 슐레밀에게 나타났다. 그는 즉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그림자를 돌려드리겠습니다. 단지 여기 작은 종이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죽은 후 나는 이 서류를 갖고 있는 이에게 내 영혼을 넘길 것을 유언으로 서명하노라.> 한 마디로 영혼을 넘기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는 말이다.
내용을 읽고 깜짝 놀란 슐레밀은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정말 제가 누군지 모르시나요? 저는 보잘 것 없는 악마입니다.”
슐레밀은 ‘미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렇다고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악마의 제안을 거절했다.
악마는 그 이후에도 집요하고, 교묘하게 유혹했다. 그림자를 잠시 빌려 주기도 하고, 함께 있으면서 그림자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명만 하면 그림자를 영원히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슐레밀은 결국 악마가 준 자루까지 물에 던져 버렸다. 그제야 완전히 악마와 결별할 수 있었다. 악마가 떠나버리자, 바위에 걸터앉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자 없이, 돈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내 가슴에서부터 무거운 짐의 무게가 없어진 듯 기분은 맑아졌다.’ 비록 소중한 그림자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악마의 마지막 유혹을 이겨냈다.
이후 슐레밀은 우연히, 신기한 장화를 사게 된다. 한 걸음만 움직이면 7마일(11km)을 날 수 있는 장화였다.
슐레밀은 그때부터 그 장화를 신고 세계 여러 곳을 다닌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그림자가 없는 모습으로 끝내 사람들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돈 때문에 놓쳐버린 사람됨의 가치들,
세상은 항상 매력적인 것으로 유혹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고 믿음까지 줄여서야 되겠는가.
<그림자를 판 사나이>
저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한국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그러나 원제
<페터 슐레밀의 신기한 이야기
(이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표기함)>
는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었고,
지금도
뛰어난 가치를 지닌 고전으로 손꼽힌다.
‘그림자’와 ‘행운의 주머니’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말한다.
어떤 학자는
돈만 숭배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상징으로,
어떤 이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 샤미소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독일로 망명하여 평생을 독일에서 살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을 얻기 위해
그림자를 팔아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림자는
그 자체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없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
소설 속에서
그림자가 없는 주인공은
정당한 사람으로 대우 받지 못한다.
돈을 얻으려고 쫓아가다,
사람됨을 놓쳐버린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회색 옷을 입고 찾아온다.
회색 옷을 입은 세상은
항상 매력적인 것을 가지고 유혹한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안 되는 ‘그림자’보다,
금화가 나오는
‘행운의 자루’를 붙들라고 말한다.
돈도 안 되는
신앙생활은 적당히 하고,
돈이 되는 일에 더 신경을 쓰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유혹한다.
작은 거짓, 작은 타협.
그렇게 우리 손에 돈을 쥐어주고
거룩을 훔쳐간다.
돈을 주고 신앙을 가져간다.
사람들은
경제가 어려우면 많은 것을 줄인다.
간식도 줄이고,
외식도 줄이고,
그래도 안 되면
아이들 교육비도 줄여야 하나 고민한다.
그런 것은 다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줄이면 안 된다.
믿음을 줄이면 안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을 줄일 수는 없다.
내 영혼이 사는 길을
줄이지 않아야 다시 일어 설 수 있다.
정약용의 속담집 <이담속찬>에
농부아사침궐종자(農夫餓死枕厥種子)
라는 말이 나온다.
농부는 굶어죽어도
종자는 베고 잔다는 말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년에 씨를 뿌릴 종자는
먹지 않고 남겨 둔다는 말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시간을 함부로 대하듯,
가치를 모르면 소중한 것을 함부로 대한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러나 영생의 가치를 몰랐다.
젊은 청년이다. 고위 공무원이다.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할 만큼 신앙에 관심도 많았다.
말씀을 다 지킬 만큼 열정도 있었다.
게다가 부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단, 네가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이 한 마디를 넘지 못했다.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버렸다.
믿음의 가치를 몰랐다.
돈을 지키기 위해 믿음을 포기했다.
모든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을 지켰다.
그러나 영혼을 지키지 못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현재의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다.
대한민국은 매우,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한다.
시간도 돈으로 계산하고,
노동력도 돈으로 계산한다.
모든 것을 사고 팔 것처럼 말한다.
어쩌면 매순간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무겁다.
슐레밀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나는 돈 때문에 그림자를 팔았는데,
당신은 돈을 얻기 위해 무엇을 팔고 있는가?
Pastor Dr HANS 박재영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으로 돈을 벌고
현명한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사간다.
매일 86,400원을 주는 나라가 있다.
방금 탯줄을 자른 아기도, 100세 넘은 할머니도, 한 명도 빠짐없이 이 돈을 받는다. 단 조건이 있다. 저축하지 말고 써야 한다.
매일 입금되는 돈을 하루 안에 다 써야 한다.
개인 통장에 매일 86,400원이 입금되지만,
사용하지 않은 돈은 통장에 남지 않는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 돈을 ‘시간’이라 부른다.
1분은 60초이고, 1시간은 3,600초이며, 하루는 86,400초다.
누구에게나 이 시간은 주어진다.
누구나 공평하게 받은 시간을 저마다 다르게 사용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으로 돈을 벌고,
현명한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산다.”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돈을 주고 시간을 사려고 하지만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시간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한다. 가치를 모르니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 독일 소설 **
< 그림자를 판 사나이 >
(원제/ 페터 슐레밀의 신기한 이야기)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버린 남자 이야기다.
가난한 주인공 페터 슐레밀.
그는 어느 날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상의 주머니에서 무엇이든 꺼냈다.
처음에는 가죽 주머니,
그 다음은 커다란 망원경,
그 다음에는 6미터가 넘는 양탄자,
심지어 살아있는 말 세 마리를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가 페터 슐레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의 그림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혹시, 저에게 당신의 그림자를 넘겨주실 수 있을까요?”
“당신은 그저 고귀한 그림자를 들어 올려서 제 안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허락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대가로 언제든 금화를 꺼낼 수 있는 ‘행운의 자루’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서 커다란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그 자루 안에서 10개의 금화를 끊임없이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슐레밀은 얼른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거래합시다. 내 그림자를 가져가시고 그 자루를 주세요.”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지체 없이 슐레밀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슐레밀의 그림자를 풀밭에서 살짝 거둬들여 둘둘 말아 접은 후 몸 안에 집어넣었다.
슐레밀은 하찮은 그림자보다 금화를 꺼낼 수 있는 자루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주저하지 않고 그림자를 팔아버렸다.
이후 슐레밀은 자루에서 많은 금화를 꺼냈다.
누구보다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슐레밀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나님 맙소사!
저 불쌍한 사람에겐 그림자가 없네!”
또 비난하기 시작했다.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에서 걸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
그제야 그림자를 팔아버린 것이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금화가 많아도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자의 가치는 슐레밀의 생각보다 컸다.
슐레밀은 가는 곳마다 돈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어디서나 예상치 못한 일은 발생하는 법.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들켰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경멸했고 배척했다. 결국 슐레밀은 그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한 번은 철저한 준비를 하고 도시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정착해서 살기로 한 도시에, 믿을 수 있는 하인 벤델을 먼저 보냈다. 벤델은 그곳에서 집을 구해 주인에게 맞게끔 꾸몄다.
집안 어디에 있어도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구조를 변경했다. 집 앞에는 나무로 우거진 공간을 만들었다.
해가 떠도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게 했다.
슐레밀은 그곳에 정착했고, 많은 돈을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미나’라고 하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미나’의 부모에게 들키고 만다.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나’의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다시 슐레밀에게 나타났다. 그는 즉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그림자를 돌려드리겠습니다. 단지 여기 작은 종이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죽은 후 나는 이 서류를 갖고 있는 이에게 내 영혼을 넘길 것을 유언으로 서명하노라.> 한 마디로 영혼을 넘기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는 말이다.
내용을 읽고 깜짝 놀란 슐레밀은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정말 제가 누군지 모르시나요? 저는 보잘 것 없는 악마입니다.”
슐레밀은 ‘미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렇다고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악마의 제안을 거절했다.
악마는 그 이후에도 집요하고, 교묘하게 유혹했다. 그림자를 잠시 빌려 주기도 하고, 함께 있으면서 그림자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명만 하면 그림자를 영원히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슐레밀은 결국 악마가 준 자루까지 물에 던져 버렸다. 그제야 완전히 악마와 결별할 수 있었다. 악마가 떠나버리자, 바위에 걸터앉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자 없이, 돈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내 가슴에서부터 무거운 짐의 무게가 없어진 듯 기분은 맑아졌다.’ 비록 소중한 그림자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악마의 마지막 유혹을 이겨냈다.
이후 슐레밀은 우연히, 신기한 장화를 사게 된다. 한 걸음만 움직이면 7마일(11km)을 날 수 있는 장화였다.
슐레밀은 그때부터 그 장화를 신고 세계 여러 곳을 다닌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그림자가 없는 모습으로 끝내 사람들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돈 때문에 놓쳐버린 사람됨의 가치들,
세상은 항상 매력적인 것으로 유혹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고 믿음까지 줄여서야 되겠는가.
<그림자를 판 사나이>
저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한국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그러나 원제
<페터 슐레밀의 신기한 이야기
(이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표기함)>
는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었고,
지금도
뛰어난 가치를 지닌 고전으로 손꼽힌다.
‘그림자’와 ‘행운의 주머니’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말한다.
어떤 학자는
돈만 숭배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상징으로,
어떤 이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 샤미소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독일로 망명하여 평생을 독일에서 살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을 얻기 위해
그림자를 팔아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림자는
그 자체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없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
소설 속에서
그림자가 없는 주인공은
정당한 사람으로 대우 받지 못한다.
돈을 얻으려고 쫓아가다,
사람됨을 놓쳐버린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회색 옷을 입고 찾아온다.
회색 옷을 입은 세상은
항상 매력적인 것을 가지고 유혹한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안 되는 ‘그림자’보다,
금화가 나오는
‘행운의 자루’를 붙들라고 말한다.
돈도 안 되는
신앙생활은 적당히 하고,
돈이 되는 일에 더 신경을 쓰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유혹한다.
작은 거짓, 작은 타협.
그렇게 우리 손에 돈을 쥐어주고
거룩을 훔쳐간다.
돈을 주고 신앙을 가져간다.
사람들은
경제가 어려우면 많은 것을 줄인다.
간식도 줄이고,
외식도 줄이고,
그래도 안 되면
아이들 교육비도 줄여야 하나 고민한다.
그런 것은 다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줄이면 안 된다.
믿음을 줄이면 안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을 줄일 수는 없다.
내 영혼이 사는 길을
줄이지 않아야 다시 일어 설 수 있다.
정약용의 속담집 <이담속찬>에
농부아사침궐종자(農夫餓死枕厥種子)
라는 말이 나온다.
농부는 굶어죽어도
종자는 베고 잔다는 말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년에 씨를 뿌릴 종자는
먹지 않고 남겨 둔다는 말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시간을 함부로 대하듯,
가치를 모르면 소중한 것을 함부로 대한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러나 영생의 가치를 몰랐다.
젊은 청년이다. 고위 공무원이다.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할 만큼 신앙에 관심도 많았다.
말씀을 다 지킬 만큼 열정도 있었다.
게다가 부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단, 네가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이 한 마디를 넘지 못했다.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버렸다.
믿음의 가치를 몰랐다.
돈을 지키기 위해 믿음을 포기했다.
모든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을 지켰다.
그러나 영혼을 지키지 못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현재의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다.
대한민국은 매우,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한다.
시간도 돈으로 계산하고,
노동력도 돈으로 계산한다.
모든 것을 사고 팔 것처럼 말한다.
어쩌면 매순간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무겁다.
슐레밀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나는 돈 때문에 그림자를 팔았는데,
당신은 돈을 얻기 위해 무엇을 팔고 있는가?
Pastor Dr HANS 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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